감정은 '나와 대상'의 분열 위에서, 어떤 생각에 붙은 '믿음'이라는 에너지가 작용해 일어납니다. 이 글은 그 구조를 불교의 고집멸도(苦集滅道)에 비추어 풀어, 감정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의 지도를 그립니다.
우리는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룰 '나와 대상의 분열'과 '믿음의 느낌'이 어떻게 불교의 고집멸도(苦集滅道) 중 고(苦)와 집(集)에 해당하는지, 그것을 소멸시킬 방법(滅)은 무엇이며, 그를 통해 어떻게 감정적 자유(道)에 이를지, 더 나아가 '나와 너'의 밀고 당기는 이원적(二元的) 구조에 기반한 감정이 아니라, 어떻게 장엄한 대자연을 느끼고 지복에 이르는 일원적(一元的) 감정으로 나아갈지 살펴볼 것입니다.
집(集)은 그것이 작용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먼저 무명의 바람이 불고 불어 수많은 먼지들을 일정하게 쌓으면, 그렇게 모인 것이 집(集)입니다. 그렇게 쌓인 경험의 흔적인 집(集)에 매달리며 지키려 하면 집(執)이 되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것에 묶여 꼼짝 못 하게 되면 '착(着)'이 됩니다. 다시 말해 집(執)은 매달리는 과정이요, 착(着)은 붙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가장 기본적으로는 아무런 이유도 없고 알지 못할 무명(無明)의 바람으로 인해 모여 집(集)이 되고, 그것을 지키며 굳어지면 집착(執着)이 되어 흔히들 말하는 카르마로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감정의 구조는 단순합니다. 먼저 감정은 생각(contents)과 믿음(energy)으로 이루어진 내면의 중심축과, 그에 부딪히는 외부 상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때 생각은 다시 '나와 대상'이라는 구조로 분화되며, 그중 '나'에 에너지가 더 많이 투입되어 '주체'로 삼으면서 '주체감'이 형성되고, 이 주체를 유지하고자 외부 상황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체감은, 나와 대상이 동시에 만들어내는 '나/대상감'과, 태어나면서부터 늘상 있어 온 '존재감'으로 구성됩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기반한 감정적 충돌은, 그 충돌을 일으키는 생각에 붙어 있는 '믿음의 에너지'를 느껴 멈추면 되고,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감정이 올라오는 즉시 '나와 대상'의 분열을 파악하면 즉각 그 감정은 힘을 잃게 됩니다. 물론 충돌이 아니라 무조건적 사랑에 기반한 '이원 구조의 사라짐' 역시 체험되나, 여기서는 고통의 원인이 되는 감정적 충돌의 과정을 상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몸을 보호하려는 공포심이나, 몸의 에너지원이 되는 포도당에 대한 끌림 등 본능적인 충동을 제외하면, 모든 좋고 싫은 감정은 일종의 부딪힘입니다. 자신이 기준 삼는 어떤 것과 일치하거나 불일치하는 것을 만나면 좋고 싫은 느낌을 만들어내고, 그 느낌이 유쾌하거나 불쾌한 반응을 일으키며, 또 증폭되면 '감정'으로 느껴집니다. 다시 말해 감정은 자신이 기준 삼고 있는 어떤 '느낌'이나 '생각'이 그 기반이 된다는 말입니다.
느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생겨나는가? 그것은 '분리' 속에서 일어납니다. 우선 촉각의 느낌을 살펴봅시다. 손을 탁자 위에 대면 어떤 '느낌'이 일어납니다. 즉 손과 탁자의 '만남'이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감각적 느낌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고막과 소리의 만남에서 '청각적' 느낌이 일어나고, 눈과 사물의 만남에서 '시각적'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의식적 느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의식'적 '느낌'은 무엇과 무엇의 만남일까요? 다른 오감은 타고난 감각기관이 지닌 '기준'이 있습니다. 즉 귀는 20~20,000Hz에 반응하도록 타고났고, 눈은 가시광선에 반응하도록 기준이 잡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식은?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거나 '익숙하다'고 느끼는 것은, 내면에 '무언가'가 기준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이 기준은 타고나지 않고, 살아가면서 경험에 의해 쌓입니다. 그것이 다른 오감과 차이 나는 점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의식은 분리를 기반으로 일어나며, 이것이 고통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또 감정의 기반이 되는 느낌 역시 분리를 그 기본 토대로 삼고 있습니다. 특히나 '느낌이 증폭된 형태'인 '감정'은 분리를 일으키는 '생각'이라는 차원을 딛고서 일어납니다. 간단히 말해, 내가 받아들인 '생각'이 기준이 되고, 그 생각에 어긋나는 '상황'이 일어나면, 내가 받아들여 기준 삼고 있는 생각이 스스로의 존재를 '유지'시키기 위해 '분노'하거나 짜증을 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점 하나가 있는데, 분노의 강도는 내가 그 생각을 '얼마나' '믿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점입니다.
분노의 강도는, 내가 그 생각을 '얼마나' 믿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이 두 경우 모두 '고속도로에서는 100km 이상으로 달려야 해'라거나 '끼어들 때는 깜빡이를 켜고 빨리 끼어들어 지나가야 해'라는 '생각'을 믿고 있으며, 그 믿음과 다른 '상황'에 부딪히자 '분노'가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허무감'은 어떨까요? 나는 감정의 기본 구조를 보자, 이제 '허무감'의 뿌리를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래 '나는 모든 것을 알았어',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 없어'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 '생각'에 에너지가 강하게 가서 붙어 있으면 '허무감'도 강하게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허무감의 뿌리를 '볼 수 있다' 해서 허무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뿌리가 되는 생각에 붙어 있는 '믿음'이라는 에너지가 계속 관성적으로 작용하고 있기에, 이를 다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면에 '나와 대상'의 분열이 일어나면 아주 빠르게 '의식'이 생겨납니다. 의식이란 '내'가 '무언가'를 알거나 느끼거나 생각하는 과정이므로, 그전에 '나'와 '무언가'로의 분열이 일어나 있어야 합니다. 그 분열은 의식과 함께 감정도 생산해내는데, 특히 이 허무감은 내게 최종적으로 생겨난 흥미로운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흥미로워지기까지는 한동안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허무감을 흥미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그 허무감에 '빠져 있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허무감에서 빠져나온 후 그것을 비롯한 모든 감정들을 면밀히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모두가 '나와 대상'이라는 내적인 분열을 기반으로 하고, 그중 하나에 생각이 붙어 있으며, 그 생각을 얼마나 '믿느냐'에 따라 감정의 강도가 강해진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라는 것은, 우리가 '깨어있기'에서 말한 '내적인 경험의 흔적'인 감지(感知)에 이름이 붙어서 생긴 관계망이므로, 생각의 아래에는 감지들 간의 밀고 당김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형성되어 있는 밀고 당김의 패턴은 대부분 무의식적인 것으로, 우리가 정(情)이라고 부르는 것들입니다. 이 밀고 당김의 패턴인 정(情)이 외부 상황과 만나면 하나의 실마리가 되어 미묘한 분위기(mood)를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정서(情緖)이고, 정(情)이라는 무의식적 패턴이 의식화하여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감정의 발생과 얼개를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감정(感情)이란 그 아래 미묘한 무드인 정서(情緖)가 증폭된 것이고, 정서는 무의식적 정(情)들의 발현이며, 정은 감지(感知)들의 밀고 당기는 패턴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현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으로 마음이 '나와 대상'으로 분리되어야 합니다. 나와 남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본능적인 쾌/불쾌의 움직임만 있을 뿐, 감정이라 할 만한 것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감정은 정서가 증폭된 것이고, 정서는 정(情)의 발현이며, 정은 감지들의 밀고 당기는 패턴이다.
이렇게 감정의 구조가 보이자 '안다'는 것에서 자연스레 풀려나며, 이제 매 순간을 '신비롭게'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내가 움직이는 손동작 하나, 몸동작 하나가 전 우주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 몸과 우주가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강한 신비감이 올라온 것입니다. '신비'란 '모른다'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나는 모든 것을 안다',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은 없다', '이 삶의 모든 것은 명확해졌다'라는 생각에 강한 에너지가 머물렀기에, 나의 '의식(意識)'은 그것으로 가득했고, 그러한 '나'는 그토록 '권태롭고 지루하였던' 것입니다.
처음 의식을 넘어서게 되면 의식이 있는 '일상'에서도 초월이 가능하긴 하지만, 관성적으로 남아 있는 '믿는(信) 생각(念)'들은 좀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관성을 다루는 것이 바로 감정적 에너지를 다루는 근본 처방입니다.
'모른다'를 의식의 기반으로 삼으면, 매 순간이 신비감으로 가득 찬 일상이 된다. 그것은 기쁨이며 황홀한 전율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어떻게 '안다'거나 '믿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는, 모든 '경험'을 통해 내면에 남겨진 '흔적'들이 그러한 기준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접적 경험의 흔적이 될 '타인의 판단'을 '믿어버려도' 그에 의해 기분 좋거나 나쁜 '감정'이 생겨납니다. 또 타인의 의견을 '믿는 정도'에 따라 감정의 강도가 크거나 작아지며, 그 의견을 믿는 정도에 따라 의존적이 되거나 독립적이 됩니다. 즉 타인이 '당신은 멋지군요'라고 말했을 때 기분이 좋아지고, '당신은 틀렸어'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을 '믿는다면' 기분이 나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믿지 않으면' 결코 크게 기분 상하지 않게 됩니다.
이 원리를 알겠습니까? 우리는 어린아이가 '아저씨는 바보야'라고 말하면 무시하고 '믿지 않기에' 기분이 상하지 않지만, 다른 성인(成人)이 그렇게 말하면 '그가 나를 바보라고 무시한다'라는 '자신의 생각'을 '믿어버리기에' 기분이 상하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무시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사실일지 모르나, 그것을 '믿어'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것을 믿고 안 믿고는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스스로 가볍게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여기에 '믿음'의 신비가 있습니다. 이 '믿음'이란 것은 일종의 에너지이며, 관성적(慣性的) 자동 패턴을 띱니다. 따라서 한순간에 쉽게 떨어져 나가지지 않습니다. 관성이란 오랜 세월 쌓이고 쌓여 형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업(業)이라 하는 것입니다. (물론 2부에서 보듯이, 내적인 분열을 매 순간 통찰하면 즉각적으로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것이 통찰의 힘입니다.)
이처럼 감정은 대부분 관성적입니다. 그것이 한때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아주 쓸모 있었지만, 이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대부분 관성적인 '믿음'에 의해 촉발되는 자동 반응인 것입니다.
그렇게 관성화되어 있는 감정적 반응은 그 원인을 '안다'고 하여도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익숙해진 무의식적 패턴'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붙어 있는 에너지인 '믿음'을 느낄 줄 알면, 이제 드디어 관성을 벗어날 첫걸음이 됩니다. 여기에 '믿음'을 '느낀다'는 것의 강력한 의미가 있습니다. '느낀다'는 것은 거기서 떨어져 나왔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느낀다'는 것은, 거기서 떨어져 나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제 감지를 발견하고, '주의' 연습과 '믿음' 연습을 통해 이 '믿음'을 직시하며 '나와 대상'의 분열을 파악하고, 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여행을 시작해 봅시다.
※ 두 연습 모두 4단계 여정 카드(감정다루기 → 의식의 대해부 기초·중급·심화)로 안내됩니다. 흔들릴 때는 '감정다루기'부터 시작해, 준비가 되면 '감정의 대해부'로 더 깊이 들어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