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호]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오감의 한계속 사물 - ‘깨어있기’가 깨어있게 한다(4부)
| 무연 | 오인회 편집부 인터뷰 |이번호부터는 오인회에 참여하였던 무연 님과의 대담을 위주로 오인회에서 진행되는 작업을 소개합니다. 감지에서 감각, ‘나’라는 느낌에까지 이르러 점차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하나의 ‘마음속 현상’으로 보는 과정을 세세히 담았습니다. 관심있게 봐주세요.무연 님은 ‘마음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면서, 생각이 어떤 과정으로 일어나는지 궁금했습니다. 우연히 《깨어있기》 책을 만나게 되었고, 책 속의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내 마음의 상”이라는 문구가 가슴에 와 닿았다 합니다. 그후 깨어있기 프로그램과 오인회 모임에 참가하면서, 내 마음의 상이 내면에서 언어로 나타난 것이 생각이고, 외부의 움직임으로 표출된 것이 행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자각하는 것도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길 중에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깨어있기’란 단어가 사람을 깨어있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지내고 있습니다(편집자주). -->...눈은 사물을 향하고 그 포커스도 맞추었지만 주의를 사물에 보내지 않는 주의제로나 전체주의로만 가 있어도, 눈의 초점이 달라진 것도아닌데 마음으로 ‘흐릿하게 보인다’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물리적 눈의 포커스는 그 사물에 가 있어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마음속에 쌓인 경험적 정보information를 외부로 투사하지 않아 흐릿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평시에 우리는 그 경험적 정보를 주의에 실어서 외부 사물에 투사해 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자꾸 연습해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눈에 보이는 것, 익숙하게 안다고 여겨지는 것이 하나의 느낌이라는 것이 와 닿게 될 것입니다. 그때 ‘세상은 마야maya다.’라는 말이 와 닿습니다. 환상이라는 말입니다. 왜 마야maya냐 하면,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오감의 한계를 가지고 접촉하고 있는 사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눈보다 더 정밀한 감각기관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이 ‘사실’처럼 보이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눈에 보이는 ‘느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눈에 보이는 매끄러운 유리잔의 표면이 바이러스 에게는 구멍 뚫린 계곡처럼 느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이 느낌이라는 것이 철저하게 와 닿기 시작하면,....more 149호_146무연4(25_5).pdf
아침의 통찰 : 느껴지는 것은 ‘내’가 아니다(백일여행 2부)
백일의 여행, 늘 있는 주체인 관조의 발견과..(2부) 아침의 통찰 : 느껴지는 것은 ‘내’가 아니다 혜량스님│ 제23차 백일학교 졸업발표 그 사건이 일어난 다음부터는 아침마다
통찰이 일어났습니다. 새벽에 저절로 눈
이 떠지더군요. 내가 뜨려는 의도를 안 냈
는데도 눈이 떠졌어요. 눈은 그냥 떠지고
느낌들이 느껴졌어요. 그냥 몸으로 느껴
졌어요. 몸이 그냥 몸으로 느껴지고 어떤
통증이나 아픔 같은 것도 느껴지는데, 거
기다가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 느낌이 있을 때 그냥 느낌으로 느껴졌
어요. 제가 자가면역질환이잖아요. 엄청 아프거든요. 아플 때 진짜 아
픈데, 거기에다가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 느낌을 그냥 느끼는 거예요.
그러면 느낌은 느낌대로 있고, 느낌을 아는 이 마음은 이것대로 있더
라는 것입니다. 아픔과 아프지 않음이 동시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
프지만 조금 있으면 그 아픔이 사라지고, 아픔도 오래 안 가더라고요.
느낌은 오래 가지 않았어요.
그러다보니까 내가 아프다는 것을 붙잡지 않게 되었습니다. 몸은 아
파도 마음이 그 아픔에 붙잡히거나 취착하는 구조가 아니니까 아픔이
일어났다가 금방 사라지고 그 다음날 비슷한 시각이 되면 그 느낌이
똑같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이렇게 아픔이 느껴지고 몸이
느껴진 거죠. 그러면서 ‘아, 이건 느낌이지. 느껴진다는 것은 내가**이 글은 지난 7월부터 100일간 함양연수원에서 백일학교를 마친 혜량스님이 100일 간의 생활과 거기서 얻은 통찰에 대해 소개한 졸업발표를 녹취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편집자 주). 061백일의(25-2).pdf 백일의 여행, 늘 있는 주체인 관조의 발견과..(1부)** 백일학교 신청하기
백일의 여행, 늘 있는 주체인 관조의 발견과..(1부)
백일의 여행, 늘 있는 주체인 관조의 발견과 그것을 넘어가기(1부) 혜량스님│ 제23차 백일학교 졸업발표인생의 불만족과 결핍감으로 외적대상을 추구하던 소녀가 이번 생은 없는 것으로 치고 진리를 추구하겠다고 온 몸과 마음으로 불교에 뛰어들었습니다.대행스님을 통해 외적추구가 내적추구로 바뀌면서 잠시 기쁨을 맛보았으나 근본적 해결을 보지 못하고 늘 진리에 대한 갈증 속에 있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만난 초기불교, 나냐난다 스님, Mutual Causality in Buddhism and General System Theory, 이중표 교수 등 그외 전환점이 되어준 몇 가지 사실과 사람들을 통해 깊어지지만 그럼에도 여전한 갈증을 느끼던 스님.그런 스님이, 백일동안의 탐구를 통해 느끼고 경험한 불교와 깨어있기 이론의 체계적체험, 그 과정 속에서 몸으로 경험한 ‘늘 보는 주체’의 발견, 건드릴 수 없는 그것과 그것을 넘어설 준비 상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이 글은 지난 7월부터 100일간 함양연수원에서 백일학교를 마친 혜량스님이 100일 간의 생활과 거기서 얻은 통찰에 대해 소개한 졸업발표를 녹취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편집자 주). 054백일의(1부)(25-1).pdf 늘 있는 주체인 관조의 발견과 그것을 넘어가기(2부)** 백일학교 신청하기
‘내가 있음(I AM)’은 ‘나는 누구이다’에서 ‘누구’라는 변화와 차이
를 뺀, 우리 모두가 같은 순수한 의식과 같습니다. 그 ‘내가 있
음’에 현상적인 모든 신념과 옳음과 가치는 스스로 부여하기에
달렸으며, 그 부여를 통해 삶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말합니다. (편집자 주) 모든 것은 자신에 대한 태도에 달려있습니다. 스스로에게 사실
이라고 확고히 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세상에서 깨어날 수 없습
니다. 즉, “나는 강하다”, “나는 안전하다”, “ 나는 사랑받고 있
다”와 같은 당신의 자아관념이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결정합
니다. 당신이 “나는 사람이다, 나는 아버지이다, 나는 미국사람
이다”라고 말할 때 당신은 다른 I AM을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인 재료인 하나의 I AM을 다양한 개념이나 배열로 규
정짓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 주)
세상 모든 것들은, 그것들이 받아들여질 때,
빛에 의해 외부로 나타난다.
외부에 나타난 것들은 모두 빛이다.
- 에베소서 5:13
‘빛’은 의식이며 , 의식은 다양한 형상과 수준으로
나타날지라도 결국 ‘하나’입니다.
그 하나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식은 무한하게
많은 상태들로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만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식에는 실제로 분리나 차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하나의 I AM(나)이라는 의식은 나눠질 수 없습니다. 나는(I
AM) 스스로를 부자, 가난한 사람 혹은 도둑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내 존재의 중심인 I AM은 내가 가진 자아관념과 상관없이 언제나
그대로입니다. 나의 존재 중심에는 I AM(나)만이 존재하며 이것이
수많은 형태들과 자아관념을 외부 세상에 나타내고 있습니다.
나는 I AM입니다.
I AM은 절대자가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며 만물이 기반하는
토대입니다. I AM은 첫 번째 원인 재료입니다. I AM은 하느님의
스스로에 대한 인식입니다.
내가(I AM) 너에게 나를 보냈다.
- 출애굽기 3:14
나는(I AM) 나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자이다.
- 출애굽기 3:14
고요하라. 그리고 내가(IAM) 하느님임을 알라.
- 시편 46:10
I AM은 영원한 인식의 느낌입니다. 인식의 참다운 중심에는 I
AM에 대한 느낌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 있는지,
내가 무엇인지를 잊어버릴 수도 있지만 내가 존재함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존재함에 대한 인식은 내가 누구이고, 어디 있고,
무엇인지를 잊어버리는 것과는 관계 없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I AM은 무수히 많은 형상들 속에서도 항상 동일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more 미내사소식지 2023-11b.pdf
2023年 9月: 생각은 움직임의 한 형태이다
우리 뇌에는 두 가지 시각 체계가 있다. 무엇경로는 과거 경험 내용과의 상관관계, 어디경로는 내 몸과의 위치적 상관관계이다. 무엇 경로와 어디 경로는 보완적 역할을 한다. 예컨대 어디 시각 경로를 무력화하면, 그 사람은 어떤 물체를 바라볼 때 그 물체가 무엇인지는 알지만 그 물체에 다가가지는 못한다. 예를 들면, 자신이 컵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기묘하게도 그 컵이 어디에 있는지는 말하지 못한다. 이번에는 거꾸로 무엇 시각 경로를 무력화하면, 그 사람은 그 물체에 다가가 손을 뻗어 그것을 잡을 수 있다. 그 물체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생각의 움직임 역시 기준틀의 적절한 위치와 내용들 사이를 움직이는 것과 같다. (저자 주)우리 뇌에는 두 가지 시각 체계가 있다. 눈에서 신피질까지 시신경을 따라가 보면, 그것이 무엇 시각 경로와 어디 시각 경로라는 두 가지 시각 체계로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무엇 경로는 뇌 뒤쪽에서 시작해 양옆으로 빙 돌아가는 일련의 피질 영역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디 경로는 마찬가지로 뇌 뒤쪽에서 시작하지만 위쪽으로 올라가는 일련의 피질 영역들로 이루어져 있다. 무엇 시각 체계와 어디 시각 체계가 발견된 지는 50년이 넘었다. 몇 년이 지난 뒤 과학자들은 다른 감각에도 이와 비슷한 경로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과 청각도 무엇 경로와 어디 경로를 담당하는 구역이 있다. 무엇 경로와 어디 경로는 보완적 역할을 한다. 예컨대 어디 시각 경로를 무력화하면, 그 사람은 어떤 물체를 바라볼 때 그 물체가 무엇인지는 알지만 그 물체에 다가가지는 못한다. 예를 들면, 자신이 컵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기묘하게도 그 컵이 어디에 있는지는 말하지 못한다. 이번에는 거꾸로 무엇 시각 경로를 무력화하면, 그 사람은 그 물체에 다가가 손을 뻗어 그것을 잡을 수 있다. 그 물체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적어도 시각적으로는 알지 못한다. 손으로 물체를 만져 촉감으로 그 물체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는 있다.)무엇 구역과 어디 구역에 있는 피질 기둥들은 비슷하게 생겼다. 세포의 종류와 층들과 회로도 비슷하다. 그런데 왜 서로 다르게 행동할까? 무엇 구역과 어디 구역에 있는 기둥은 어떤 차이가 있길래 서로 다른 역할을 할까? 두 종류의 기둥은 작동 방식에 어떤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 쉽다. 어쩌면 어디 기둥은 다른 종류의 신경세포가 있거나 층들 사이에 다른 연결이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 기둥과 어디 기둥이 비슷하다는 점은 인정하더라도, 아직 발견되지 않은 물리적 차이가 있을지 모른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만약 이런 입장을 견지한다면, 여러분은 마운트캐슬의 제안을 거부하는 셈이다. 하지만 마운트캐슬의 전제를 버릴 필요는 없다. 우리는 왜일부 기둥은 무엇 기둥이고 일부 기둥은 어디 기둥인지 단순한 설명을 제시했다. 무엇 기둥의 피질 격자세포는 대상에 기준틀을 첨부한다. 어디 기둥의 피질 격자세포는 우리 몸에 기준틀을 첨부한다. 만약 어디 시각 기둥이 말을 할 수 있다면,....more 미내사소식지 2023-09c.pdf
2023年 7月: 바라봄을 통해 현존하기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은 “눈의 감독”이라고 알려진 수행을 통해 보는 훈련을 해왔다. 몇몇 수도 공동체는 아직도 이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 수행이 왜곡될 때도 있다. 죄지을 것이 두려워 유혹적인 것은 어떤 것도 보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이 수행의 본래 취지는 보는 것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보아야 할 것(즉 실제) 누가,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수련하는 것이다. (저자 주)...“눈 뒤에서 보는 이는 누구인가?”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이 말은 앞장에서 인용한 “귀 뒤에서 듣는 이는 누구인가?”라는 구절의 나머지 문장이다. 예수님도 실재를 보는 눈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너희의 눈은 지금 보고 있으니 복이 있다." (마 13:16) 보아야 할 것(실제) 보는 눈은 복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은 “눈의 감독”이라고 알려진 수행을 통해 보는 훈련을 해왔다. 몇몇 수도 공동체는 아직도 이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 수행이 왜곡될 때도 있다. 죄지을 것이 두려워 유혹적인 것은 어떤 것도 보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이 수행의 본래 취지는 보는 것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보아야 할 것(즉 실제) 누가,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수련하는 것이다. 바라봄에는 순수한 바라봄, 분리된 바라봄, 참여적 바라봄 세 가지가있다.• 순수한 바라봄Innocent Seeing. 듣기 위해 귀를 열 때처럼 보기 위해 눈을 열면, 정신이 본 것을 분리하여(대상화하여) 해석하기 이전에 이미 눈에 들어온 무언가가 있다. 이 순간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바라봄 안에 단순히 현존한다. 어린이들이 그렇다. 예수님은 어린이들의 현존 상태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눅 18:17) 어린이들은 어른들에 비해 이러한 순수한 “첫 시선”에 훨씬 오래 머무른다. 마태는 이 말씀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마 18:4) 여기서 “낮추는”에 사용된 히브리어는 잠언 9장 4절에서 “단순한”이나 “무지한”에 쓰인 단어와 같다. “단순한 사람은 누구나 이리로 발길을 돌려라.”(잠 9:4) 어린이가 자기를 낮춘다는 말은 젠체하지 않고 단순하다는 뜻이다. 자의식이 없다는 의미에서 무지하기도 하다.• 분리된 바라봄Split Seeing. 정신이 첫 시선의 일체감을 벗어나 본 것을 해석하려고 할 때 순수한 바라봄의 광채는 사라진다. 이로부터....more 미내사소식지 2023-07.pdf
마음사랑하는 마음이나 아름다운 마음이나 그 마음이 보석 같다 해도, 그 마음을 간직한다면, 마음의 끝은 집착과 차별뿐이다.- 초현 - · 권두언: 마음 … - 초현 -· 무연 님과의 대담 '깨어있기'가 깨어있게 한다 50· 진심직설 40회-월인越因· 홀로스 공동체 소식· 월인의 깨어있기 유튜브 강의 안내· 강의·도서 구입 안내 오인회소식지 146호 2023-11.pdf
마음의 습성 - 오인회 소식지 145호
마음의 습성마음이 내게 들러붙고 가까이 있으려 하는 것은 내가 그 집착의 내용들을 따뜻하게 환영해주기 때문이다- 초현 - · 권두언: 마음의 습성 … - 초현 -· 무연 님과의 대담 '깨어있기'가 깨어있게 한다 49· 진심직설 39회-월인越因· 홀로스 공동체 소식· 월인의 깨어있기 유튜브 강의 안내· 강의·도서 구입 안내 오인회소식지 145호 2023-10.pdf
주체가 없는 공간 - 오인회 소식지 144호
주체가 없는 공간나와 대상 사이 비어있는 공간에
존재해보세요. 그러면 모든 논리의 모순이
드러나게 되고 나와 다른 사람의 논리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초현 - · 권두언: 주체가 없는 공간 … - 초현 -· 무연 님과의 대담 '깨어있기'가 깨어있게 한다 48· 진심직설 38회-월인越因· 홀로스 공동체 소식· 월인의 깨어있기 유튜브 강의 안내· 강의·도서 구입 안내 오인회소식지 144호 2023-09.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