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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지인텐시브 1주일 과정
by 홀로스 on 16:24:41 in 프로그램

제1일 : 감지연습(사물과 식물)

제2일 : 감지연습(식물과 동물)

제3일 : 감지연습(동물과 사람)

제4일 : 감지연습(사람과 글씨)

제5일 : 주의제로 연습

제6일 : 전체주의 연습

제7일 : 총정리


용어정의

‘깨어있기’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경험을 통해 분류된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정의를 분명히 하게 되면 경험에 도움이 될 것이므로 먼저 소개합니다.

감각(感覺 : 있는 그대로를 느껴 앎)

감각하다(있는 그대로 느끼기)

우리가 태어나 처음 감각기관을 사용하기 시작할 때 느껴지는 것으로, 자아의식과 존재감에대한 아무런 지식과 통찰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암흑에서 시작하는 아이와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감각’은 수동적인 받아들임입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수상행식(受想行識)의 수(受)와 유사합니다. 사물을 직접적으로 감각하며‘나’로 인한 왜곡이 없습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우리가 보는 사물에서 기억으로 인한 ‘이름’과 그것의‘형태 및 질(質)’에 대한 느낌을 내려놓았을 때 남는 순수한 느낌입니다.

감지(感知 : ‘익숙하다’, ‘안다’는 느낌)

감지하다(익숙하고안다고 느끼기)

감지(感知)는 무언가 ‘안다’는 느낌입니다. 감각된 것이 흔적을 남겨 내면에 쌓이기 시작한 이후, 우리는 이제 그것들을 통해 외부의 사물을 보게됩니다. 그 내적인 기준으로 인해 느껴지는 ‘익숙한’ 느낌이 감지이며 이것은 일종의 미세한 기억입니다. 이때부터 사물은 있는 그대로 ‘보여지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그렇게 내면에 쌓인 것을 통해 ‘보는’ 능동적 대상이 됩니다. 즉,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쌓인 것을 통해’ ‘보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상(想)과 유사합니다. 내면에 쌓인 일종의 고정된 과거(過去)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계, 책상과 같은 사물에서 식물, 동물에 이르기까지 익숙하고 안다고 느껴지는 느낌, 더 나아가 슬픔, 행복과 같은‘느낌’도 역시 감지에 속합니다. 느껴서(感) 안다(知)는 의미입니다. 지금 이 순간, 처음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한번이라도 맛보았던것 으로 느껴진다면 모두 일종의 과거인 감지에 속합니다. 즉, 이름붙일수 있는 모든 것은 감지이며 과거입니다. 그리고 감지에는 시각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청각, 후각, 미각, 촉각적인 것까지 모두 있습니다. 예를들어 감지가 체험되고 구별된다면, 흔히 선사(禪師)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은 바람이 흔들리는가, 깃발이 흔들리는가라고 물을 때, 흔들리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고 ‘그대의 마음이다’라는 말의 의미가 이해될 것입니다. 내 안의 과거인 ‘흔들린다’는 감지가 느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화가 아니라 실제 우리 의식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감지를 구별하게 되면 우리의 의식작용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가장 미세하면서도 상위의 감지로는 ‘나’라는 느낌이 있습니다. 수많은 감지들 중 어떤 상황에 적절한 하나의 감지와 동일시 되어 ‘주체’로 느껴지는 것이 ‘나’라는 느낌입니다.

모든 감지는 고통을 만들어냅니다. 왜냐하면 감지란 내적인‘안다’를 기준삼아 다른 것들과의 사이에 끌림과 밀침이 일어나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끌림이 일어나면 그것과 함께 하려하게 되고, 함께 하지 못하면 미세한 고통이 일어나며, 끌림이 강해질수록 고통은 강해집니다. 그와 반대로 밀침은 그것과 함께하고 싶지 않은 것인데 이때 피하지 못하면 고통이 뒤따릅니다. 이렇듯 모든 내적인 끌림과 밀침은 괴로움의 원인이 됩니다. 이를 불교에서는 고(苦)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고(苦)는 ‘감지’ 수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의 생각(想) 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 형성되는 일종의 이미지나 미세한 느낌까지 포함합니다. 즉, ‘깨어있기’의 감지(感知)는‘익숙하다’거나‘안다’는 느낌으로서, 우리가 보통‘시계’라고 할 때 떠오르는 그 느낌에서‘이름’을 뺀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그에 반해 감각은 이름과 형태와 질을 모두 뺀 상태입니다. 감지는 감각들이흔적을 남긴 것이며 그들간의 관계가 작용하여 서로 간에 밀침과 끌림이 일어난 상태입니다. 하나의 사물에서이름을 빼더라도 그것의 전체 이미지나 느낌에는 분명히‘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름을 빼어냈으므로 그 내적 대상을‘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안다’는 느낌은 있는 것입니다. 즉 감지는 ‘안다’거나 ‘익숙하다’는 느낌을 지닌 일종의 과거입니다. 우리는 이 무의식적 저장물과 그들 간의 관계에서 오는 끌림과 밀침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리지 못하여 그것에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무의식적으로 저장된 이미지들의 관계 속에 빠져서 행동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가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며, 그에 따라 행동하고는 나중에 의식하여 후회하기가 다반사인 것입니다. 우리의 좋다, 싫다는 대부분이 이 감지의 층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보통은 그것이 의식화되지 않기에 자신의 행동이 의식적으로 컨트롤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장된 경험으로서의 과거기억인 감지는 흔히 카르마로, 과거의 경향성으로 불리어지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심층심리로 들어가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러한 감지에는 유전적, 집단 무의식적 저장물도 있을 것이며, 그 저장물들 사이의 끌림과 밀침으로 인한 작용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 깨어있으면, 그 감지들과 동일시되는 순간을 알아차릴 수 있으며, 그러면 감지에 저절로 쏟아 부어지는 생명에너지가 차단됨으로 해서 동일시가 끊어지고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됩니다. 그러므로 깨어있기만 해도 이 동일시의 고리는 언제든 끊을수 있습니다(‘깨어있기-의식의 대해부’ 책 ‘동일시 끊기’ 연습 참조).

주의(注意)

주의에는 자동적(自動的) 주의와 의도적(意圖的) 주의가 있습니다. 자동적 주의는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며, 놀라거나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소리에 저절로 우리의 주의가 가는 것과 같이, 자신도 모르게 주의가 사로잡히는 경우입니다. 이는 감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에 반해

의도적 주의는 어떤 뜻을 가지고 주의를‘보내는’것입니다. 그 모든 주의에는 내적으로 끌어당기는 힘(인력: 引力)과 밀어내는 힘(척력: 斥力)이 수반될 수 있습니다. 그 의식적 끌림과 밀침이 아주 미세하여 잘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내적으로 감지(感知)가 완전히 형성된성인(成人)들은 늘 무의식적으로라도 이러한 끌림과 밀침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때 끌림과 밀침은 불교에서 말하는 탐(貪)과 진(嗔)에 해당한다 할 수 있습니다. 탐진(貪嗔)이 보통‘의식적인 측면’에서 일어나는 것을 주로 말한다면, 여기서는 그것이 무의식적 감지의 층에서도 일어나며 그 모든 것을 포괄하여 말하기 위해 끌림과 밀침이라는 용어를 사

용하였습니다.

끌림(貪)과 밀침(嗔)이 느껴져 그것이 자각 되더라도, 보통은 의식하기 전에 이미 자동적으로 동일시가 진행되고 그로 인해 에너지 통로가 형성되어 되돌리기 어렵게 됩니다. 그리고 동일시된 의식적 대상에 에너지가 유입되기 때문에‘내가 저것을 싫어한다’거나 ‘나는 저것을 좋아한다’는 느낌에 무의식적으로 빠져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일단 여기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밀침의 경우에는 에너지가 유입되기 시작하면, 저항하는 그 상황에 이르기 싫다는 느낌이 커지게 됩니다. 그때 자신의 주의(注意)를 그 밀침의 ‘느낌’에 주지말고 그 밀침을 ‘자각하고 있는 의식’쪽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러면 그 밀침의 감정으로 유입되는 에너지가 줄어들고 깨어있는 의식 쪽으로 에너지가 더 많이 유입되게 됩니다. 그 후 감정은 자연스레 약해지고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동일시가 일어나는 순간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순간을 볼 수 있게 되면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식은‘깨어있기’로 들어가게 되고 에너지도 낭비되지 않습니다. 알아챈다는 것은 생명에너지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동일시로 흐르는 거대한 에너지 강물을 애써 막지 않아도 그 흐름을 저절로 멈추게 합니다.

생각과 의식

앞의 세 단계를 다시 정리하면 순수한 감각단계를 지나면서 우리 근원의식에 일종의 흔적인 감지(感知:‘익숙하다, 안다’는 느낌을 일으키는 것)를 남기는데, 이후 저장된 흔적인 감지와 지금 새롭게 주의가 가서 감각된 정보가 비교, 대조되면서 우리 내면에 생각과 의식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생각도 결국 근원 에너지의 패턴입니다. 따라서 생각의 내용에 빠지지 않고 생각을‘감각하기’시작하면, 그것을 정밀하게 들여다보게 되고 그것이 의식에너지의‘작용’임을 알아채게 됩니다. 그런 후에는 일어났다 사라지는 생각이라는 패턴과 감정이라는 패턴, 더 미세한 감지라는 패턴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물로 비유하자면, 생각과 감정과 감지는 일종의 파도입니다. 분명한 모양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서로 간에 구별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가 물의‘작용’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의 작용이란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됩니다.

동일시

생각과 의식이 발생하면 이때부터 어느 한 생각과의 동일시가 일어나고, 동일시가 일어나면 에너지가 주로 쏟아 부어지는 부분인‘나’가 고착되며, 이후‘나 아닌 것’과의 끌림과 밀침을 통해 좋다, 싫다는 감정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도로에서 차 한대가 급하게 끼어듭니다. 순간 화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화가 나는 것은 ‘저런 행동을 해서는 안된

다’라는 생각이 내면에 저장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생각과 ‘내’가 동일시되어 있는 것이지요. 즉, 그 주체가 되는 생각이 반대되는 상황으로 인한 생각과 부딪혀 밀침의 감정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두 가지 생각 모두가 저 밖의‘외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내면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이고, 나의 생명 에너지가 그 중 하나의 생각과 동일시될 때 분노의 느낌이 분명해진다는 점입니다. 만일 이때 일어난 생각과 동일시가 되지 않고 초연히 이 두 생각들이 생겼다 사라지는 현상을 볼 수 있었다면 자유에 한발 가까워졌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동일시란 지금 일어나는 수많은 생각들 중, 그동안 살아오면서 내가 받아들이고 인정한 생각의 네트워크에 유사한 것을 ‘나’라고 이름붙여 에너지 중심을 삼는 것입니다.

감정

현재 일어난 상황이,‘나’와 동일시된 생각에 일치하거나 불일치함에 따라 끌림(탐욕)과 밀침(저항)이 발생하는데 그 에너지가 증폭되면서 감정이 일어납니다. 대표적 감정을 단계별로 나누면 밀침에 해당하는 것에는 무기력 또는냉담함, 슬픔, 두려움, 증오, 분노가 있고, 끌림

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육체적 즐거움에 대한 탐닉, 사랑에 대한 탐닉, 정신적 기쁨에 대한 탐닉이 있습니다. 냉담함이란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하며 에너지가 갇혀있는 것을 말합니다. 거기서 조금 나와 움직일 수 있지만 수동적으로 느끼기만 하는 슬픔이 있습니다. 그 후 뭔가 대처를 해보고 싶지만 상처를 입을까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두려움이 있고, 상대를 향해 쏟아내기 시작하는 증오가 있습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폭발하는 분노가 있습니다.

탐욕에는 크게 육체적, 과도적, 정신적 탐욕이 있는데, 육체적 탐욕은 즐거움을 갈망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과도적인 탐욕은 흔히 갈애(渴愛)라고 하는 사랑의 탐욕으로, 그 후 정신적 탐욕은 기쁨에 탐닉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 모든 감정들을 느끼고 사용하는 것은 좋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감정들에 빠지는 것입니다. 저항하게 되는 감정들은 위험의 신호로 보고, 탐욕하게 되는 감정들은 잠시 누린다고 여긴다면 이들을 잘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러한 감정에 대해 내면에서 끌리거나 밀치는 순간을 알아채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을 향해 생겨나는 에너지 통로를 멈출 수 있습니다. 사실 모든 감정은, 그 전에 생겨나 있는 감지와 동일시되면서 에너지 통로가 생성되고 그를 통해 생명에너지가 주로 부어져, 그것과 밀침 또는 끌림이 일어나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어난 감정은 나의 심신을 온통 물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생각에 끌리거나 저항할 때 그 생각의 짝이 되는 숨겨진 주체 생각을 순간적으로 알아채게 되면 주체생각과의 자동적인 동

일시가 멈추고, 그로 인해에너지 통로가 생기지 않으며 그 두 생각 전체를 그냥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감각에 열려있기

이렇게 어느 한 생각이나 어느 한 감지와의 동일시를 알아채기 위해 ‘모든 감각에 열려있기’라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자신의 몸을 민감한 진동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의를 몸에 둡니다. 사방에서 날아와 내 몸에 부딪히는 소리가 몸의 어느 부위에 자극을 주고 공명을 일으키는지에 주의합니다. 그렇게 하면 사방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소리에 빠지지 않고 모든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의 주의는 소리 나는 사물이나 장소로 빠르게 달려가 그것만을 듣습니다. 그렇기에 들려오는 수많은 소리들 중 하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거기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 습관적인 ‘빠짐’을 멈춰보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시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의를 자신에게 두고 사방을 봅니다. 어느 한 가지에 시각적 주의가 빠지지 않도록 하여 보게 되면 시야에 나타나는 모든 것이‘보이게 됩니다’. 어느 한 가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내적인 감정이나 생각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생각과 감정 하나에 빠지지 말고 그냥 내적중심에 주의를 남겨둔 채 있으면서 열어놓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생각과 감정 및 느낌들이 전체적으로 ‘느껴집니다.’어느 하나를‘느끼려고’하거나, 어느 한 가지 느낌이나 생각, 감정에‘빠지지’않은 채 그 모든 것을 향해 열려있기가 가능합니다.’ 그리되면 모든 것이 느껴지고, 보이고, 생각되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 ‘보여짐’이 깊어지면 내가 동일시 되어있는, 그래서 ‘내’게 보이지 않던 ‘주체생각’도 보이게 됩니다. 사실 주체가 되는 생각이나 느낌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내’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동일시된 주체생각을 보기 위해서는 섬세하고 투명하며 중도적인 자세가 요구됩니다.

깨어있기 - ‘있음’을 깨닫기

깨어있기는 투명한 의식의 상태이며, 아무런‘안다’는 생각이나 느낌이 없이 열려있는 의식을 말합니다. 보통 우리는 어떤 생각이나 느낌을 늘 의식하고 있으며, 그것을 내용이 있는 의식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깨어있기는 어떤 내용도 없는 의식이며, 그런 의미에서‘의식이 없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항상 현재에 반응할 수 있는 상태이므로 텅 빈, 열려있는 의식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감각되기 시작하면 이제 그 생각을‘아는 깨어있는 의식’느끼기로 갑니다. 깨어있기는 수동적으로 감각하기입니다. 의식과 생각, 감정, 감지 등 모든 것을 수동적으로 감각하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대로감각하기, 이것이 깨어있기의 정의입니다. 그리고 그 깨어있기가 항상 가능하도록 열려있는 것입니다. 깨어있기 연습 과정에서 졸림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졸린다는 것은 지금 깨어있는 것이 아니라‘깨어있다’는‘감지’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식은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어‘깨어있다’는 느낌도 만들어냅니다. 즉, 일종의 미세한 이미지를 만들어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 역시 고정된 과거이기에 졸리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변화가 없으면 의식은 졸음에 빠집니다. 이때는 그 이미지를 느끼고 있는 깨어있는 의식을 느끼도록 해야합니다. 또 피곤하다는 현상도 나타납니다. 힘들고 피곤하다는 것은 내적인 끌림이나 밀침에 에너지를 낭비하기 때문입니다. 끌림은 뭔가 좋은 경험을 하였다고 판단하여 그것을 계속 맛보려고 하는데서 오는 것이고, 밀침은 뭔가 자신은 열등하다고 느끼거나 잘 안될까 불안하거나 다른 일들에 신경이 쓰이는 등의 느낌에 저항할 때 일어납니다. 그 저항과 탐욕에 에너지를 낭비하기에 피곤한 것입니다. 이때는 그저 자신이 내적으로 무언가에 끌리거나 밀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깨어있기 상태로 돌아오면 됩니다.

각성(覺性-의식의 본질을 깨닫기)

‘느끼는 자’로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근원으로 있는 것입니다. 깨어있는 의식을 느끼거나 순수한 있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하는 자로 있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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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어있기 기초/심화
    2019-06-14 14:0 ~ 2019-06-16 18:0
  • 오인회 화요모임
    2019-01-01 19:30 ~ 2019-12-31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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