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가 물든 마음을 가르치거나 맑게 하는 과정인 진여훈습眞如熏習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자체상훈습自體相熏習과 용훈습用熏習이 그것입니다. 자체상훈습自體相熏習은 우리 자체가 진여, 즉 진리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밝히려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내적인 인因이 됩니다. 반면에 용훈습用熏習은 외부적인 만남을 통한 깨우쳐짐을 뜻하는데 외적인 연緣이 됩니다. 나무 스스로 가진 불에 타는 소인과 나무에 불이 붙게 할 수 있는 성냥이나 불씨 같은 외부의 요인 두 가지로 비유할 수 있겠네요. 내적인 인因과 외적인 연緣이 만나서 인연因緣을 이루어 나무에 불이 붙는 것처럼, 마음이 맑아지는 깨우침의 과정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 본성은 언제나 진리 그 자체여서 스스로를 드러내려고 하는 측면인 내적인 인因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깨우치려고 애써 노력하는 특성의 측면이 더 부각됐었죠. 그런 것이 있어야만 더 빠릅니다. 그 다음으로는 그런 내적인 인因이 있다 해도 외부의 연緣, 즉 내면의 진리를 일깨우는 불쏘시개가 되어줄 외부의 스승이나 책 등의 연緣을 만나지 못하면 깨어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은 외부의 도움에 해당되는 용훈습用熏習, 즉 외부의 작용에 대해 자세히 살펴봅니다.
용훈습用熏習이란 중생의 외적인 원인의 힘이라고 했습니다. 인因은 물든 마음을 본질의 투명함으로 바꾸려는 내적인 열망이라고 할 수 있고, 연緣은 스승이나 책, 그리고 외부에서 일어나는 어떤 조건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차별연差別緣이란 범부와 이승二乘(연각승과 성문승)이 분별사식훈습分別事識熏習을 통해 가는 길입니다. 생사와 열반이 다르다는 분별을 통해 간다는 말이죠. 희로애락에 시달리고 두려움과 슬픔 등의 괴로움을 많이 겪는 사람은 생사生死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열반의 세계로 가고 싶다는 마음을 내게 됩니다. 그 사람은 생사의 고통과 그런 것이 없는 열반, 이렇게 둘로 나누고 있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범부와 이승인의 분별사식分別事識을 통한 길입니다. 생사와 열반을 나누는 차별이 하나의 인연이 되어 깨달음의 길로 가게 합니다. 그런 차별을 통해 열반을 향해 애써 노력하고 수행하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는 생사와 열반이 따로 없음을 알아채려고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은 내 마음이 만든 분별에 의해 나타났을 뿐, 실제로는 지금 내가 느끼는 분별된 현실은 없다는 것을 알아채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감각기관과 그 감각기관의 도움을 받아 형성된 마음의 세계가 그려낸 분별된 그림이지, 실제 저 밖의 세상은 그 어떤 분별도 없는 세상입니다. 가시광선만을 볼 수 있는 눈으로 바라보니까 일곱 색깔 무지개의 색깔을 띤 사물들이 분별되는 것이지요. 만약 적외선과 자외선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더라면 더 많은 색깔로 분별된 세계를 경험할 것입니다. 물론 그런 감각기관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남은 그 감각기관의 흔적들을 교묘하고 엄밀하게 결합하고 재조정하여 조절할 수 있는 마음의 장場이라는 것이 없다면 세밀하게 분별해서 보지 못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개는 사람보다 더 뛰어난 후각을 가졌고, 귀도 아주 예민하지만 우리만큼 세계를 다채롭게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그 이유는, 개의 눈은 흑백만 구별하고, 미각도 민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귀와 코의 민감도는 사람보다 낫지만, 그 감각을 마음의 장에서 조합하는 능력은 사람보다 정교하거나 엄밀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즉물적으로 반응하고 마는 것입니다. 마음 또는 의식이라는 또 다른 민감한 감각 기관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개들은 우리보다 둔하게 분별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자체가 분별되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세계라는 것은, 경험자와 경험되는 대상 사이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느낌’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가 죽어도 이 세계는 변함없을 거야.’라고 믿죠. 내가 죽으면 내 세계는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경험하는 그들의 세계가 있을 뿐이지요. 또한, 세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감각기관과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바뀌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변화무쌍한 세상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일체의 분별은 우리 마음속의 분별이라는 점과 마찬가지로, 원래 차별이라는 것이 없는데 중생의 마음은 생사의 고통과 열반의 즐거움을 나누고서 생사를 버리고 열반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용훈습의 차별연差別緣을 통한 수행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는 분별없는 지혜를 통해 궁극에 도달하게 됩니다.
연緣은 깨우침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외부로부터 다가오는 도움입니다. 그중에 분별함으로써 도움을 얻는 것이 차별연이라면, 언뜻보게 된 분별없음을 통해 가는 것이 평등연平等緣입니다.
- 《대승, 현상과 본질을 뛰어넘다》 中권 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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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내용은 ‘깨어있기-의식의 대해부’ 워크숍의 후속모임인 오인회(悟因會)에서 월인 님이 강의한 2012년 대승기신론 강의의 일부입니다.
▶ 이 강의 전체가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있습니다: 《대승, 현상과 본질을 뛰어넘다》 상,중,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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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대승기신론 강의 44강
▶ 강의: 월인(越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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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경험자와 경험 대상 사이의 관계│대승기신론 강의 (中권 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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