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습熏習은 ‘물듦’입니다. 예를 들면, 아무런 향기가 없는 옷에 향수를 뿌리거나 향기가 있는 방에 한참 두어서 옷에 향기가 배는 것이 훈熏이고, 습習은 습관입니다. 습習은 반복된 행동에 의해 만들어진 관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훈습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본질인 진여가 무명에 물드는 염법훈습染法熏習과 무명이 본질에 물드는 정법훈습淨法熏習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법淨法, 진여법眞如法과 염법染法이라는 말에 붙어있는 법法이라는 글자입니다. 진여법眞如法은 진여 자체가 아니라 진여에 의해 만들어진 현상입니다. 우리가 듣고, 보고, 느끼고, 만지고,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은 모두 법法입니다. 법法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번뇌를 일으키는 현상으로서의 법, 진리로서의 법, 진리를 깨친 사람인 부처님의 설법으로서의 법입니다. 일반적으로 드러난 모든 현상을 법이라고 했습니다. 화장실에서 물이 내려가는 것도 법이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도 법이고, 사람이 화를 내는 것도 법이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고 황홀감에 빠지는 것도 다 법입니다. 어떤 법칙에 의해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사과가 떨어지고, 눈물이 흐르고 기쁨이 일어나는 것이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법에 의해 일어납니다. 모든 현상 밑에 어떤 법칙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현상 자체를 법法’이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표면의 파도가 현상으로서의 법이라면, 파도를 일으키는 원리는 진리로서의 법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에 대해 표현하는 것을 설법說法이라 합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법은 드러난 것이기에 모두 현상이고, 우리가 파악하는 진리 역시 현상으로서의 진여법眞如法이지 결코 진여 자체가 아닙니다. 오늘 말하는 진여 또한 바로 그런 법法으로서의 진여입니다.
대승기신론은 크게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으로 나뉩니다. 진여문은 진리 그 자체에 대한 것이고, 생멸문은 나타났다 사라지는 현상에 대한 것입니다. 생멸문에 포함된 훈습론도 현상에 대한 것인데, 오늘 강의 중에 육진六塵 탄생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육진六塵은 여섯 가지 먼지라는 뜻으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말합니다. 색色은 시각적인 대상, 성聲은 청각적인 대상, 향香은 후각적인 대상, 미味는 미각적인 대상, 촉觸은 촉각적인 대상, 법法은 의식적인 대상입니다. 왜 먼지 진塵 자를 쓸까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라는 여섯 가지 대상이 육근六根, 즉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우리 안에 들어와서 깨끗한 진여를 더럽히기 때문에 먼지 진塵 자를 사용하여 육진六塵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육진六塵은 육근六根에 의해 임시적으로 탄생한 것이지 원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섯 가지 대상은, 그것을 파악해내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있을 때만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촉각이 없으면 촉진觸塵은 없고, 시각이 없으면 색진色塵은 없습니다. 시각적인 대상은 색깔을 띠고 있으므로 눈에 보입니다. 눈은 특정한 주파수 범위(405~790THz)만 감각하는데, 그 범위 내의 시각적인 대상을 색色이라고 말합니다. 색깔이 없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투명한 색이라고 표현되는 것도 눈에 보이는 색色입니다. 물은 투명해보이지만, 물결에 따른 색의 변화와 빛의 반사를 눈이 파악해내는 것이지요. 눈에 안 보이는 것이 진짜 투명한 것입니다. 여섯 개의 감각기관이 없는 곳에 육진六塵은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근경식根境識은 동시에 나타나서 동시에 사라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특별한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과 같습니다. 세상은, 사실 우리의 감각기관이 나누어 경계 지어놓은 세계世界일 뿐이지요. 감각기관이 없는 곳에 세계는 없습니다. 밖에 뭔가 있다고 여겨지면 마음의 식識이 작동한 것입니다. 눈은 405~790THz, 즉 초당 405~790조 번을 진동하는 부분을 감광합니다. 그런 시각의 한계 지어진 영역이 없다면 바깥 세계라고 할 만한 것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는 인간의 세계죠. 바이러스나 개는 우리가 보듯이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우리 느낌의 세계라는 말입니다. 눈은 아주 정밀한 기관이므로 눈에 뭔가 보이면 ‘사실’로 여겨지지만, 눈도 하나의 감각기관일 뿐입니다. 시각은 촉각보다 정밀하기 때문에 눈을 감은 채 팔에 무언가를 갖다 대면 촉각만으로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촉각적인 느낌을 우리는 ‘느낌’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눈으로 보는 것은 ‘사실’로 여기는데 만약 눈보다 더 정밀한 감각기관이 있다면, 그 기관이 파악하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정확하며, 눈으로 보는 것은 ‘느낌’이라고 해도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시각도 느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사실이 아니라 느낌입니다. 사실이라는 것은 없어요. 우리의 ‘감각기관에 보이는 사실’일 뿐이지요. 우리가 보는 세계는 우리의 감각기관끼리 서로 약속해놓은 일종의 부호와 같습니다. 사람의 눈이 모두 비슷하게 생겨서 비슷한 기능과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보이는 것은 파란색이라고 하자.” 하고 약속한 것뿐입니다.
생멸문의 모든 내용도 나타났다 사라지는 어떤 한계 속의 현상일 뿐입니다. 진여법 또한 우리가 진리라고 파악하고, 느끼는 현상일 뿐이에요.
- 《대승, 현상과 본질을 뛰어넘다》 中권 127쪽
▶ 이 내용은 ‘깨어있기-의식의 대해부’ 워크숍의 후속모임인 오인회(悟因會)에서 월인 님이 강의한 2012년 대승기신론 강의의 일부입니다.
▶ 이 강의 전체가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있습니다: 《대승, 현상과 본질을 뛰어넘다》 상,중,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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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대승기신론 강의 35강
▶ 강의: 월인(越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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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도 물든다│대승기신론 강의 (中권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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