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여 님은 30여 년 직장생활을 끝으로 퇴직 후 현재는 부산의 한 전문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대학을 들어갈 때 우연히 읽은 석지연 스님의 《선으로 가는 길》이 동기가 되어 관심가지게 된 의식세계가 대학시절 유행했던 크리슈나무르티, 라즈니쉬로 이어지고, 이런저런 선도 단체나 깨우쳤다는 사람을 찾아 공부를 하다가 2000년 초 찾은 무심선원에서 접한 미내사 격월간지를 통해 《깨어있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책을 통해 뭔가를 발견하고도, 너무나 오랜 시간 헤맨 여운으로 8여 년을 혼자 공부하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월인 님을 2018년 겨울에야 찾았습니다. 깨어있기 기초, 심화를 듣고서 실마리를 경험하고, 그 이후로 오인회를 통해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승자박하는 마음의 구조를 경험하고서야, 그토록 오랜 시간의 숙제를 좀 해결했다는 느낌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생각이 올라오고 끌려감도 일어나지만, 크게 문제되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편집부 반여 님은 누군가요? 반여 저는 지금 이렇게 하고 있는 것도 ‘나’이고, 말하고 있는 ‘나’를 보고 있는 놈도 ‘나’이고, 내가 느끼는 ‘느낌’도 그리 생각을 하고… 그래서 꼭 정의를 안 내린다면 ‘나’는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나는 없다’는 표현을 너무 오랫동안 하다 보니까 반대로 ‘나는 없다’고 말하고 있는 놈은 또 누구냐 이거죠. 그래서 ‘나’라는 표현은, 니르말라는 ‘나는 없다’ 이런 것으로 책을 여러 권 냈지만, ‘나는 없다’라기보다는 ‘나는 모든 것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나은 게 아닐까요? 그래서 굳이 ‘나’를 없애려고 난리를 칠 필요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즉, “‘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게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종합적으로 보면, 모든 것이 내가 된다는 것은 결국 내가 없다는 것과도 같은 말이지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있더군요. 우리 식으로 말하면 주의 에너지가 뭉친 곳은 다 주체로 느껴지기 때문에 주의 에너지를 많이 보내면 그것들이 다 ‘내’가 되는 거지요. 편집부 모든 것이 ‘나’라면 ‘나’라는 것이 따로 있지 않으니 그러면 ‘나’라는 말도 필요가 없는 게 되지 않을까요? 반여 그렇죠. 편집부 ‘나’와 ‘대상’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의식의 분열과 관련해서 말씀해 주세요. 반여 무명의 바람이 불어 대상이 일어나면 그것과 동시에 ‘나’라는 것이 나타나지요. 주의 에너지가 많이 뭉친 곳을 주체로 느끼게 되고, 그 주체를 말로 표현하게 되는 시점에 ‘나’라는 말을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대상’과 ‘나’는 동시에 일어나고 그 사이에 느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