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9년 7월 28일 제20차 백일학교 졸업식에서 행한 강연을 녹취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자기 관찰을 통해 무심을 경험하였지만 뭔가 여전히 답답하다고 느껴진다면 무심의 경험세계인 네 가지 무색계의 어딘가에서 머물러 있는 경우이며 거기서 벗어나는 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편집자 주). “이번 강의에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팔해탈이나 구차제정 중에서 무심無心에 해당하는 ‘무색계’의 과정을 경험적으로 설명합니다. ‘마음이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욕계’와 그것을 넘어 호오가 없는 분별로 보는 ‘색계’를 넘어 드디어 분별없는 무심과 빈 마음의 단계로 접어들면 거기 몇 가지 세분화된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무색계(여기서 色이란 분별의 세계를 말함)인데, 단순히 표현한다면, 각 단계에서 체험되는 ‘빈 마음 체험’, ‘비어있음을 앎’, ‘있음에 대비된 없음’, ‘있고 없음마저 넘어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분별이 없는 마음에도 그것을 세밀히 들여다보면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아무것도 없음을 경험하거나 무심, 순수의식 등을 체험하였다고 하는 경우 이 네 가지 단계 중 어느 하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차이가 확인되지 않으면 대부분은 텅 빈 ‘느낌’인 공처에 머물기 쉽습니다. 자기 관찰을 하다가 무심의 단계에 들어서면 우리는 그저 다 같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텅 빈 마음에 머무르게 되고 일상에서 크게 걸림이 일어나지는 않으나 그 빈 마음을 넘어서지 못해 알지 못할 답답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번 강의를 통해서는 무심의 경험이 일어났으나 무언가 정체되어 있다고 여기는 분들에게 자신이 어디서 막혀있는지 알아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저자 주)
여러분들은 지금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엉덩이가 의자에 닿아있죠? 조금 전까지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그렇죠? 그러나 제가 질문을 하니 ‘의식’이 되고 있죠. 의식된다는 것이 곧 ‘마음의 상으로 느낀다’는 것입니다. 즉 마음의 상도 느껴지고 구분이 되려면 주의라는 에너지가 가야합니다. 마음의 힘인 ‘관심’이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마음의 에너지입니다. 이렇게 에너지가 가지 않으면 ‘느껴지지’ 않아요. 물론 ‘자극’은 있었어요. 제가 ‘엉덩이가 느껴지죠?’라고 말하기 전에도 이미 엉덩이와 의자는 닿아 있어서 촉각적인 자극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의식되지는 않았’습니다. 즉 의식적으로 느껴지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의식적으로 느끼려면 그 느낌에 마음의 힘이 주어져야 됩니다. 따라서 ‘이것이 상相이구나’ 하고 알아차렸다면 그것에 에너지가 투입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렇기에 그 상에서 마음의 에너지를 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에너지가가서 형성된 상相인 줄 모르면 힘을 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감지 연습을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감지感知란 마음의 에너지에 의해 만들어진 상相, 즉 마음의 느낌입니다. 그 느낌을 의식적으로 파악하게 되면 거기서 힘을 뺄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힘을 빼면 마음의 상 없이 감각적 자극만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내무상외현색內無相外現色의 상태입니다. 안에는 상이 없지만 밖에는 자극이 있어 구분이 되는 현색現色, 즉 색깔 또는 분별되는 사물이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욕계欲界에서 첫 번째로 내유상외현색內有相外現色의 세계로 마음이 가면 우리는 욕계의 끄달림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것을 첫 번째 선정(제1선정)이라고 합니다. 마음에 휘둘리는 움직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 그래도 여전히 분별은 일어나고 있죠. 분별이 일어나면 조만간 끌려가게 되어 있어요. 분별이 일어나면 비교가 일어나고, 비교가 일어나면 좋은 것을 구분하고, 좋은 것을 구분하면 좋은 것을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의 기본 기능입니다. 따라서 분별이 되면 자연스럽게 좋은 것을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별 자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내무상외현색內無相外現色입니다. 우리가 연습시키는 감각™(깨어있기 용어) 상태, 즉 감각적 자극만 있는 상태입니다. 세 번째, 이렇게 감각적 자극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 것을 정해탈淨解脫이라고 합니다. 미묘한 사념, 생각과 느낌마저도 사라진 사념청정의 상태, 이것이 바로 맑은 해탈이라는 의미의 제3선정입니다. 여기까지가 유한한 세계입니다. 아직 투명한 텅 빈 마음을 경험하진 않았습니다. 그냥 있던 것들이 흩어져가고 사라지고 가벼워진 것뿐입니다. 여기까지가 색계(분별의 세계)이고, 이 정해탈을 넘어서 색계를 넘어가면 무색계無色界(분별이 없어지는 세계)로 갑니다. 분별이 있는 세계는 유한한 세계입니다. ‘이것’과 ‘저것’을 나누고 ‘이것’은 늘 변합니다. 이 현상계는 늘 변하기 때문에 ‘이것’과 ‘저것’을 나누는 마음은 ‘이것’을 늘 변화로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유한한 세계입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결코 무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색계까지는 유한의 세계라고 보면 됩니다. 이 색계를 넘어가면 무색계입니다. 유한에서 무한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한계지어진 ‘마음의 틀’(분별하는 마음의 틀)이 약해지고 흐려져서 무너지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무한으로, 무색계로 넘어가는 과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