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졸업식에서 행해진 중론 강의에서는 2장 관거래품의 일부 내용이 아래와 같이 소개되었습니다.
‘인식되는 현재’는 늘 과거와 미래를 포함합니다. 즉 ‘현재’란 과거+미래일 뿐 거기 진정한 현재인 ‘지금’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과거, 현재, 미래는 일종의 개념입니다. 그것을 경험적으로 살펴보면, 현재 내가 방안에 앉아있다는 인식에는,
깊이 살펴보면 ‘이 방 바닥은 안전해서 무너지지 않아, 천정도 지금까지 안전했어’라는 과거와 ‘이 방을 나서면 주변은
이러이러한 모습을 하고 있어, 잠시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거야’라는 미래가 섞여있습니다. 의식은 하지 않더라도 말이죠.
중론은 여기서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 공간이라는 내적 기초에 의해 유지되는 ‘개념’을 무너뜨립니다. 개념이 무너지면
인간의 사고는 토대를 잃습니다. 왜냐하면 사고작용은 분리를 기반한 개념에 뿌리를 두기 때문입니다. 즉, 시간적으로 보면,
이미 지나간 것에 ‘감’은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갈 것에도 ‘감’은 없습니다. 또 이 둘 사이 즉 과거와 미래 사이에는
찰나가 있을 뿐 거기 어떤 ‘감’도 없습니다. 그래서 ‘간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깊이 살펴보면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또 공간적으로 보면, 걷는 자, 걷는 행위, 걷는 장소는 없다는 것이 중론의 선언입니다. 덕산선사가 용담선사에게서
깨달음을 일으킬 때 그와 같이 ‘개념으로된 내적인 세계가 무너짐’을 경험하였습니다. 즉,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숙소로 돌아가려던 덕산이 문을 열자 밖이 너무 깜깜하였습니다. 돌아서서 용담에게 촛불을 빌리고자
‘스님 밖이 너무 어둡습니다’라고 하니 용담이 촛불을 건내주려하였습니다. 덕산이 그 촛불을 받으려는 찰나
용담은 훅-- 하고 촛불을 꺼버렸고, 그 순간 덕산은 아하! 하고 깨달음에 이르렀다. 이때 덕산의 마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용담에게서 촛불을 받으려는 순간 덕산의 마음에는, ‘문을 열었을 때의 깜깜하고 어두운 밖’이라는 ‘과거’가 있었고,
‘이 촛불을 받아 밖으로 나가면 밝게 길을 비추어 숙소로 돌아가리라’는 ‘미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용담이 덕산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던 이 과거와 미래를 훅-- 불어 꺼버렸던 것입니다. 이때 덕산의 ‘세계’가 무너져내렸습니다. 우리는 늘 ‘과거’와
‘미래’라는 ‘마음의 그림’으로 ‘현재’를 채워넣고 살아갑니다. 그 ‘그림의 세계’가 자신이 늘 살아오던 세계임을 알아챈 덕산은
그 자리에서 자신이 가지고 다니던 귀하디 귀한 경전을 모두 불살라버리고 맙니다. 더 이상 ‘그림의 세계’에서 살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그림의 세계를 비트겐슈타인도 알아채고 선언합니다. 말로, 논리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그림이며,
이렇게 그릴 수 없는 것이 사실의 세상이고, 그에 대해서는 침묵해야한다고 말이지요. 중론은 바로 이 '그림의 세계'를 모두
타파함으로써 '사실의 세상'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2월 15일(화)부터 중론 강의가 시작됩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0:00:00 인사말
0:01:24 개요
0:05:00 전체 과정
0:07:23 자기언급
0:14:33 러셀의 역설
0:16:22 수와 논리의 근간인 집합론이 무너짐
0:22:08 언어도 하나의 집합이다. 왜?
0:26:09 '나'와 집합론도 유사하다
0:29:08 비트겐슈타인의 탄생
0:38:00 우로보로스의 뱀
0:40:52 나가르주나의 中이란
0:44:55 금강경의 과거, 현재, 미래심을 얻을 수 없다
0:52:50 덕산의 흐르는 물
0:58:15 중론의 관거래품
1:06:39 논리학을 뛰어넘는 초논리학 중론
1:13:04 中이란 무엇인가
1:38:58 자비와 비국소성
1:58:37 만물이 하나라면
2:07:42 中의 삶